故 김수환 추기경 - 추모 게시판
2009-02-22 11:21 am
김추기경을 회상하며 박찬종 | 1216

김수환 추기경을 회상하며(서문)


박찬종


1999년 10월 어느 날 내가 방문연구원으로 있던 일본 도쿄의 게이오대 교수연구동 휴게실에서 나는 서울에서 보내 온 국내 신문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인사동정란에 김수환 추기경이 ‘강론집‘을 출판했다는 소개와 함께 서문 일부가 실려 있었다.


“나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위한 삶을 살다 간 예수를 닮아 가야 한다고 결심하고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으나, 수십 년이 흐르는 사이 초심과는 달리 어느 사이 귀족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고 부끄러워 한다”는 기사였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서울, 명동, 추기경 집무실, 김추기경과 사적으로 맺은 여러 인연들을 떠올렸고, 이래서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울림이 뇌리를 스쳤다. 


해외 시각으로 한국경제를 살피고자 게이오대학에서 1년 2개월간 한일교류기금 장학금에 기대어 2권을 출간했던 그 시절, 추기경과 교분을 나누었던 추억들이 그의 책자 서문 위로 아득히 흘러갔다.  


나는 추기경이 다녔던 상지대학(上智大學), ‘롯본기’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지날 때 추기경을 떠올리며 일요일마다 외국인을 위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연 등을 편지지에 옮겼다.


“저는 평소 성경 읽기와 기도를 게을리 하는 불성실한 신자임을 스스로 인식하고, 내 탓이라는 자각 속에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카톨릭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추기경님께서 새로 출판하신 강론집 서문에서 예수의 삶을 닮아가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시고 어느 사이 귀족이 된 자신을 부끄러워 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제가 그 미미한 신앙심마저 포기할 수 없게 하시는 어떤 마력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인편으로 보낸 내 편지에 김추기경은 손수 서명한 강론집을 보내 왔다.


“따뜻한 글을 보내줘서 고맙다”는 취지의 회신이었다.


김추기경은 거짓을 품지 않고 사시려고 노력하신 분임을, 또 자신의 고뇌를 스스럼없이 토로하는 분임을 가까이서 그렇게 지켜본 인연일까?


빈소가 차려진 첫날 새벽,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심경으로 명동성당 길을 어떻게 걸었는지도 몰랐다. ‘이 시대 그 누가 이 분만큼 정직하고 진솔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말하고 살다 갈 수 있을까?’ 영구 앞에 서는 순간, 그를 여읜 한 시대가 억제할 수 없는 서글픔으로 전신을 엄습했다.


이제 김추기경과의 일화를 우리 가슴에 아로새기는 일은 내게 남겨졌다. 우리공동체의 화합, 하나 될 그 날은 김추기경을 위해 드리는 기도이기도 하다. 


내가 김추기경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려 펜을 드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함이다.


2009.2.21


박찬종(아우구스띠노)





김추기경과의 인연-학원안정법 파동(1)


“학원안정법은 대학을 병영(兵營)화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입법을 포기하시오.”-김수환 추기경 1986년 8월


전두환 정권은 1986년 9월, 대학교 2학기 개강을 앞두고 학내 반정부 투쟁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유례없는 초강경 대책을 담은 학원안정법 제정을 서둘렀다. 학원 내에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도 투입하여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정권퇴진 등 반정부 활동을 일체 봉쇄하려는 내용들이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총재 이민우, 고문 김영삼, 김대중)은 입법반대 입장을 대변인 성명으로 발표하였다.


8월 13일 신민당은 정무회의에서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을 결의하였다. 회의 직후 당시 정무위원 겸 인권옹호위원장이었던 나 박찬종은 이민우 총재에게 김수환 추기경과 회동할 시 김추기경이 분명히 학원안정법을 반대할 것이 예견되므로 두 사람이 공동기자회견 형식으로 동법 제정 포기를 정부에 요구하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않겠냐고 건의하였다. 이총재는 나의 건의를 받아들여 나에게 “곧바로 김추기경에게 달려가서 회동일시를 조정해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 길로 명동성당 추기경 집무실로 달려가니, 오전 11시가 채 안 됐다. 나는 추기경을 뵙고 학원안정법을 제정하려는 정부 의도와 입법취지를 설명하고 신민당은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 추기경께서도 입법을 반대하신다면 이총재와 공동으로 입장을 표명해 달라는 방문 목적을 말씀드렸다.


추기경께서는 비서신부를 불러 그날과 다음날 일정을 묻고는 “내일 오후라야 시간이 나는데”라고 하기에 이 일은 한 시가 급하니 서둘러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추기경께서는 “그래, 그럼 서둘러야지”라고 하시며 그날 오후 3시로 예약돼 있던 면담일정을 취소하고 그 시간에 이총재를 모시고 오라고 조치했다. 그날 오후 3시 추기경 집무실에서 이총재와 김추기경의 면담이 이루어지고 나는 배석자로 참석했다. 두 사람은 학원안정법이 제정되면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병영국가로 지탄받게 되고, 민주화 일정은 더욱 암담해진다는 데 의견의 완전한 일치를 보았다.


한 시간 면담 가운데 추기경과 이총재는 군사정권의 횡포와 포악성에 개탄을 금치 못했으며, 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열망을 어떻게 성취시켜 갈 것인지에 대해서 폭넓은 의견을 교환했다. 면담 후 두 사람은 주교관 현관에서 대기하던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해 주고 면담 요지는 별도로 내가 브리핑해 주었다. 정부가 제정하려던 학원안정법에 대해 ‘대학 병영화’를 지적한 것은 김추기경이 처음이었으며, 정부 의도를 병영화라는 말로 압축, 비판함으로써 정부가 더 이상 입법을 추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틀 후, 정부는 공식적으로 학원안정법 제정 포기를  표명하였다. 김추기경은 학원안정법 관련 야당 투쟁을 결정적으로 지지하였고, 그 추기경의 위광은 폭주하던 전두환 정권의 예봉을 꺾는 계기가 되었다.


학원안정법 파동은 김추기경이 나서서 가라앉힌 것이다. 나는 이 면담 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의 미움을 단단히 사게 되었다. 이총재와 김추기경의 면담을 카톨릭신자인 내가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성사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조순형 의원 등과 그 전 해인 85년 9월 이른바 고대 앞 시위사건의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 중이었고 변호사 업무도 정지된 상태였다. 안기부가 노골적으로 그 집시법위반 사건에 개입하여 법원을 압박해서 이 면담 사건 이후 재판 속도가 빨라졌다.


2009.2.21


박찬종(아우구스띠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