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특강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
1. 병인박해 전 교회의 상황
기해박해(1839)와 병오박해1846)가 거듭 발생하여 앵베르(范世亨) 주교, 모방(羅) 신부, 샤스탕(鄭) 신부,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등과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교회는 또다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국내․외의 여러 상황이 천주교회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신앙의 자유에 대한 희망이 싹트면서, 조선 교회는 다시금 상처를 딛고 일어나, 더 넓은 지역으로 복음을 전파해 나가게 되었다.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유리하게 만든 상황으로는, 우선 양이(洋夷)라 부르던 서양 여러 나라의 위협이 점차 증대되어 간 점을 들 수 있다. 1840년대 후반기 이후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 서구 열강의 선박들이 조선 연해에 더욱 빈번하게 출몰하여 피해를 입히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이 군함 3척을 이끌고 1846년(헌종 12) 6월 15일 충청도 홍주 외연도에 나타나,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 선교사 3명을 학살한 것에 대해 문책하면서, 앞으로 프랑스 사람을 가혹하게 해치는 일이 있으면 큰 재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 서한을 정부에 전달해 줄 것을 주민들에게 부탁하고, 명년에 그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세실 사령관은 약속한 대로 조선으로부터의 회답을 얻고자 1847년(헌종 13) 6월 30일 해군 대령 피에르(Pierre)로 하여금 군함 2척을 거느리고 조선 연해로 출동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프랑스 함선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으므로, 조선 정부는 자칫 프랑스의 침략을 유발할 수도 있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크게 완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국내 정국의 변화도 박해를 완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49년(헌종 15) 6월 9일 헌종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철종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왕비가 김문근의 딸이었으므로 풍양 조씨 대신 안동 김씨가 세도 정권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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